아관파천 요약, 비판과 원인: 조선의 자주권을 위해 러시아로 간 고종 이야기

오동통통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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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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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요약, 비판과 원인: 조선의 자주권을 위해 러시아로 간 고종 이야기

서론

아관파천은 조선 후기의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발생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며 이루어진 일입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압박 속에서 자주권을 위협받고 있었고, 특히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되면서 조선 왕실과 고종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일본의 지배력 강화와 내부 친일 세력의 확산 속에서 고종은 자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했으며, 그 결과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피신, 즉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됩니다.

아관파천은 단순히 고종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일본과 러시아의 협상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의 자주권은 더욱 외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이를 통해 친일 내각을 해체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기반을 다지며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노력도 보여주었습니다. 본 포스팅에서는 아관파천의 배경, 경위, 결과, 그리고 역사적 평가를 통해 이 사건이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지는 의미와 교훈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관파천의 정의와 배경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조선의 국왕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입니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의미하며, ‘파천’은 왕이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임시로 궁을 떠나 피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고종의 피신 사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외교와 정치적 변화, 그리고 동아시아의 열강들이 조선을 둘러싼 세력 균형을 재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관파천의 배경에는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긴장과 일본의 급격한 영향력 확대가 존재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행보는 점점 강해졌습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통해 조선 왕실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고종은 그 위협 속에서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러시아와의 연대를 통해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동아시아 내 영향력이 확대되자, 고종과 조선의 친러파들은 러시아를 조선의 새로운 보호자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배경 속에서 아관파천은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자, 외세의 힘을 빌려 안정을 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을미사변과 춘생문 사건이 아관파천에 미친 영향

아관파천의 주요 계기 중 하나는 바로 을미사변이었습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일본의 공작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일본은 조선의 친일 세력을 지원하여 친일 내각을 세우고,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왕비 시해와 같은 강압적인 조치를 통해 조선 왕실에 강력한 압박을 가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고종은 일본의 감시 속에서 큰 불안과 공포를 느꼈으며, 조선의 주권을 위협하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로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춘생문 사건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첫 번째 시도로, 1895년 11월에 발생했습니다. 당시 친러파와 친미파 관리들은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 궁궐 북쪽의 춘생문을 통해 탈출시키려 했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고, 고종과 왕실은 한층 더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춘생문 사건이 실패하면서 고종은 자신이 일본의 통제 하에 갇혀 있다는 위기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이는 아관파천이라는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아관파천의 경위와 과정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고종과 왕세자는 궁녀들이 타고 다니는 작은 가마를 이용해 경복궁의 영추문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피신 작전은 매우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고종의 측근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때 고종은 친일파 내각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러시아의 보호 아래서 새로운 정국을 조성하고자 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이후 고종은 친일 내각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친러파와 친미파 인사를 중용하여 새 내각을 구성하였습니다. 김홍집과 정병하 등 친일 세력의 주요 인사들은 민중에 의해 처형되었고, 유길준 등 여러 인사는 일본으로 도피하였습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후, 조선에서 친일파의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 내부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1년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며 조선의 정국을 재편하고자 했고, 조선의 외교와 정치적 판도는 크게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와 일본의 개입과 역할

아관파천 이후 조선 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급격히 확대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조선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사 교관을 파견하여 조선군을 훈련시켰고, 일본이 주도하던 개혁 정책을 폐지하도록 지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에서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긴밀한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1896년 5월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체결하여, 조선 내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군대가 동일한 규모로 주둔하는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모스크바 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에서의 공동 간섭 방침을 정했습니다. 이 협정들은 모두 조선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조선의 자주권이 외세에 의해 무시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러일 간의 협상은 아관파천 이후 조선이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다툼 속에 놓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이로 인해 조선은 또 다른 외세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아관파천의 결과와 조선 내 정치적 변화

아관파천은 조선의 정치적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친일 내각을 해체하고, 친러파와 친미파 인사들을 등용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며, 조선 내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습니다. 또한, 단발령을 비롯한 을미개혁 정책이 대부분 철회되었고, 고종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의병을 회유하고 공세를 탕감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의 정치적 체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지방 제도 개편, 중앙 행정 개혁 등을 통해 정국의 안정을 꾀했으며, 일본인이 고문관으로 일하던 자리에 러시아인을 초빙하여 러시아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처럼 아관파천은 조선의 내각 구성과 정책에 큰 변화를 초래했으며,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 속에서 새로운 정국이 형성되었습니다.

아관파천이 대한제국 선포에 미친 영향

아관파천은 결국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의 위협을 느끼며, 조선의 자주성을 강화하고 국왕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1897년 10월, 조선은 스스로 제국임을 선언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고종이 조선의 독립성을 명확히 하고, 국왕으로서의 위상을 높여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대한제국 선포는 고종이 단순히 왕이 아닌 황제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으며, 이는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서의 위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또한 대한제국 선포를 통해 고종은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조선이 자주적 국가임을 천명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관파천으로 시작된 조선의 자주성 회복 노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관파천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비판

아관파천은 조선이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린 사건으로,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자국 영토 내에서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조선의 주권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고종이 일본의 간섭을 피하고자 했지만, 그 대가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확대되었으며, 이는 조선이 또 다른 외세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더욱이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체결한 여러 협정들은 모두 조선을 배제한 채 이루어졌습니다. 베베르-고무라 각서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는 조선의 동의 없이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외교적 합의로, 조선의 주권이 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외세의 간섭은 이후 대한제국이 자주적 국가로 성장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으며,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외세 의존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함께,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보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음을 시사하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습니다.

결론

아관파천은 조선이 일본의 지배와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의 도움을 선택한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그로 인해 또 다른 외세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 대가로 러시아의 군사적, 정치적 개입을 불러오면서 조선의 자주권은 또 다른 외세에 종속될 위험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일 내각이 해체되고 대한제국이 선포되는 등 조선 내부에서는 자주적 개혁과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국가로서 국제적 위상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이는 아관파천을 통한 정치적 기반과 고종의 의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아관파천은 결국 조선이 외세에 종속되지 않고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려는 노력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열강의 압박 속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대외 전략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조선이 일본과 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 고립을 피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더 신중한 외교적 선택이 필요했음을 아관파천은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관파천은 조선의 자주권 회복을 위한 치열한 노력이었음을 되새기게 하며, 국가의 독립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선 국제 정세 속에서 외교적 전략과 국민적 단합이 필수적임을 알려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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